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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경찰을 쫓다… 동구문화원 이상국 위원

2024.01.05
인터뷰 인물 사회
부산 동구 범일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광우. 그는 1942년 일제의 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다 미수에 그친다. 경찰에 체포된 이광우는 수개월 동안 산채로 피를 뽑히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판결문 등 공적 증거가 없어진 탓에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광우는 마침내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건 그의 아들 동구문화원 이상국(63) 전문위원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이 위원은 10년 동안 아버지를 착할 고문한 친일 경찰을 쫓았고 증언을 받아낸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 위원의 추적기를 직접 만나 들었다.


애국지사 이광우의 아들인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이 부산일보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광복절에 먹은 카스텔라

이 위원은 어린 시절 8월 15일만 되면 아버지가 사 들고 온 카스텔라를 기억한다. 이광우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큰 제과점에서 사 온 카스텔라를 두고 가족을 모아 생일 파티를 했다. 그런데 사실 그날은 누구의 생일도 아니었다. ‘오늘이 누구 생일이냐’라고 아버지에게 묻자 ‘내 두 번째 생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리송했지만 어린 마음에 그저 카스텔라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독립운동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서히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사실을 듣게 됐다. 17살의 나이에 비밀조직 ‘친우회’를 결성한 뒤 일제의 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는 것도, 경찰에 붙잡혀 10개월 동안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는 것도 알았다. 평소 절뚝거리는 아버지의 다리도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아버지가 17살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안 믿었습니다. 요즘 나이로 생각해 보면 겨우 고등학생 아닙니까. 항일 정신을 품고 실제로 행동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버지에게 조금씩 옛일을 들을 때마다 ‘정말 아버지가 그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했구나’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광우 애국지사 사진.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 제공

■인정 받지 못한 독립운동

하지만 이광우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1949년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꾸려진다. 같은 해 8월 24일 반민특위는 친일 경찰 하판락을 재판하기 위해 그가 고문한 이광우를 증인으로 소환한다. 하판락이 재판장에서 ‘이광우를 모른다’고 증언하자, 이에 이광우가 격노해 ‘네가 나를 정말 모르느냐’라며 뛰쳐나가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이광우는 하판락이 친일 경찰로 처벌받고 자신의 독립운동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얼마 못 가 해체됐고 하판 록도 풀려났다. 주변인의 반응도 싸늘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자신을 보며 격려는커녕 비웃음을 보냈다. 이광우는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선을 볼 때도 독립운동을 숨기고 ‘도둑질하다 감옥에 갔다’고 속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주변에 독립운동을 숨겼지만 자식인 우리에게는 조금씩 말을 꺼냈습니다. 특히 하판락에게 당한 고문을 설명할 때는 너무 끔찍해 듣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주사기를 몸에 꽂아 산채로 피를 뽑은 뒤 이를 몸이나 벽에 뿌리는 ‘착혈 고문’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문을 독하게 했던지 하판락에게 ‘착혈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죠.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의 고문을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이상국 위원이 부친인 이광우 애국지사를 소개한 게시판 앞에 서있는 모습.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 제공

■10년간 이어진 추적

1989년 4월 국가보훈처(현재 국가보훈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안내 공고’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위원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이 이대로 잊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광우가 복역한 김천소년형무소와 부산형무소의 기록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없어졌고,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은 거절됐다.

“이때부터 일을 하는 평일을 제외하고 모든 주말을 반납했습니다. 김천소년교도소는 물론 서울, 대전, 대구, 진주 등 아버지의 공적 자료를 찾기 위해 온갖 곳을 돌아다녔죠.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했던 주요 친일 인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반민자죄상기’라는 책에 아버지 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자신마저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1997년 <부산일보>에서 아버지를 고문한 하판락의 흔적을 찾아낸다. 당시 어버이날 포상 대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던 것이다.

“신문 기사에 나온 하판락의 주소로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라고 하자 ‘만나서 직이뿌라! 금마는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라고 분개하시더군요. 다행히 하판락을 만날 수 있었고, 처음에는 고문 사실을 부인했지만 하판락과 함께 고문을 자행했던 부하 직원의 이름을 대며 압박한 끝에 마침내 아버지를 고문했다는 증언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애국지사 이광우의 아들인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이 부산일보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렇게 이광우는 독립운동이 인정돼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하판락은 2000년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진다. 이 위원은 ‘하판락을 직이뿌라’는 아버지의 말을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이때 하판락은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믿는다. 이광우는 2007년 3월 26일 82세 나이로 별세한 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아들로서 독립운동한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고 명예를 지켜 드릴 수 있어 뿌듯합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항일 운동을 했고, 이후 6·25 전쟁 때도 참전하는 등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시대지만, 앞으로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와 민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거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배 기자(sangbae@busan.com)
남형욱 기자(thot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