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40일 전 쓰러진 하형주를 다시 일으킨 한 마디는?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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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1984년 올림픽 하프 헤비급에서 한국 유도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하형주. 사실 그는 원래 씨름 선수였습니다. 씨름은 물론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전국체전을 휩쓸기도 했던 이력의 소유자죠.
장면 2. 310mm가 넘는 발 크기로 ‘왕발’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학생 때는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하지 못해 맨발로 운동장을 뛰기도 했습니다. 처음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갖게 된 날 하형주는 기쁜 마음에 신발을 품에 안고 자기도 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세계 정상에 오른 뒤 교수(동아대)를 거쳐 스포츠 행정가(국민체육진흥공단)로 변신하기까지, 여러분이 몰랐던 하형주의 숨겨진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소개합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하형주 상임감사가 자신의 선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정수원·김보경 PD blueskyda2@
-유년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보다는 체격이 좀 컸고요. 체격과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포츠를 접하는 횟수가 많았고요. 그러다 보니까 다양한 놀이 문화로서 하나씩 스포츠를 접했던 것 같습니다.
-유도 이전에 씨름 선수로 활약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가운데 아무래도 체격도 있고 하니까 운동하는 각 부에서 저를 많이 탐냈던 건 사실이고 유혹도 많았습니다. 근데 저는 어릴 때부터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돼서 장군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우연히 씨름을 접하게 됐습니다. 근데 씨름도 접했을 때 진주상고라는 걸출한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잘했던 고등학교인데 거기에서 스카우트 돼서 딱 6개월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6개월 동안 씨름도 참 재미있었고 실력도 왕성히 늘었고 나중에는 그 씨름의 계기가 유도 대표 선수 생활하는데 큰 받침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유도로 종목을 전향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이왕 운동할 거면 올림픽 종목 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앞에 여러 종목 중에서 유도라는 스포츠가 저한테 어릴 때부터 매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먼 친척 중에 한국 유도 챔피언이 있었거든요. 그분을 따라서 막연히 유도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 운동할 때 올림픽 종목 유도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작정했습니다. 유도는 제가 있었던 진주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전학을 가서 마음에 드는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전학 가서 본격적으로 하게 됐고, 그 와중에 체육고등학교라는 특수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다 보니까 레슬링부에서도 전국체육대회에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이 들어와서 유도도 하면서 전국체전 때만 시합을 나갔었습니다. 레슬링 시합을 나갔는데 레슬링은 아시다시피 그레코로만형하고 자유형하고 두 종류 있잖아요. 두 종류 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가서 전국체전 금메달을 두 개 따고 3학년 때도 전국체전 금메달 네 개를 딴 적이 있습니다. 레슬링을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유도를 했던 바탕이 돼 있고 그다음에 레슬링은 심판 룰을 알아야 하니까 경기 룰만 좀 배워서 나갔는데 운 좋게 제가 전국에 1등 하게 되고 그랬었습니다.
-동아대 시절 훈련법이 독특했다고 들었습니다.
본격적인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 시작했던 건 대학에 들어가면서인데요. 제가 유도 헤비급이었기 때문에 연습 파트너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늘 연습량이 부족했는데 우리 동아대학교 유도부의 전통은 헤비급들이 다 잘했습니다. 우리 동아대학교 뒤에 보면 구덕산이라고 아주 명산이 있습니다. 지금은 동아의료원으로 바뀌어 있고 그 뒷산에 보면 편백나무가 너무 많습니다. 편백나무는 아시다시피 쫙쫙 뻗어 있는데요. 그래서 동아대학교에서만 내려오는 연습 방법의 하나가 편백나무를 잡고 밭다리후리기라든지 기술 넣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걸 한 6개월 정도 하고 나면 일반 사람들은 그냥 넘기기가 좀 쉬웠지요. 그만큼 우리들만의 그 파트너가 부족했고 연습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걸로 연습량을 채웠습니다.
재미나는 뭐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저녁에 혼자 운동하고 있으니까, 절에서 스님이 "나무 부러진다"고 (제가) 우리 동아대학교 운동복을 입고 있으니까 동아대학교 총장한테 일러준 거예요. 그래서 총장님한테 불려 잡혀갔는데, "왜 나무를 못살게 굴었나" 하길래 "못살게 군 게 아니고 연습량이 부족해서 나무를 붙잡고 연습을 매일 밤 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 유도부 전통 훈련 방법입니다. 나무 안 다칩니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칭찬도 받고 고기 사 먹으라고 용돈도 받고 그랬었습니다.
-훈련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저는 운동하면서 힘들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즐거웠고, 매일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게 너무 빨리 밤이 지나서 다음날 오기를 바랄 정도로 유도에 푹 빠져 있었거든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유도가 제 인생이 있어서 하나의 종교로 자리 잡을 정도였으니까요. 매일 새로 바뀌어 나가는 내 모습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했지 힘든 거는 별로 못 느꼈습니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 앞에서 태극기를 든 하형주가 기수로 입장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1984년 LA 올림픽 개막을 40여 일 앞두고 큰 부상을 당했는데, 당시 어떤 심정이었나요.
저희는 국제 경기를 앞두고는 일요일이나 현충일 때도 연습했거든요. 그날 내가 너무 많은 긴장도 했었고 또 연습량이 너무 많은 상황에서 선수를 던졌습니다. 선수가 앞에 한 바퀴만 돌아가야 하는데 한 바퀴 반이 돌아가면서 빨려 들어가면서 제 머리를 매트에 박혔습니다. 머리를 매트에 박히니까 허리 목 밑으로 마비 증세가 왔지요. 그래서 허리를 크게 다쳤던 기억이 있었던 게 그때 첫 좌절이라 할까요. 지난번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도 내가 못 나갔는데 다쳤으니까, ‘나하고 올림픽하고는 인연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그다음에 참 많이 억울해하면서도 울면서 병원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다쳤을 때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이제 우리 모든 선수촌 관계자가 와서 격려하고 했는데 저한테 격려해 주신 선수촌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언제든지 곧 일어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너는 대한민국 기수로 뽑혔다.” 였어요. 선수단 기수로 뽑혔다길래 제가 깜짝 놀라요. 기수는 참 영광스러운 자리거든요.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 상징적으로 금메달을 확실히 딸 수 있는 사람을 시키거든요. 그래서 내가 꼭 붙잡고 “저는 안 됩니다. 그 어려운 막중한 기수를 내가 어떻게 합니까. 지금 내 허리도 제대로 못 쓰는데” 하니까. “너는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신 분이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 두 번이나 딴 김성집 총장이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많이 도와줬고 그분에 의해서 제가 금메달 딸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LA 현지에 가서 연습 파트너가 부족하다고 했는데, 제 선배 되시는 분이 딱한 사정을 알고 대신 받아줬습니다. 유도를 그분도 안 하다가 하니까 온 전신에 멍이 들 정도로 낙법을 쳐도 우리는 몸이 평상시에 많이 단련돼 있지만 그분은 유도 안 하다가 하시다 보니까 멍이 들 정도로 제 유도 파트너가 돼 주셨습니다. 또 그 아픔을 다 견뎌내고 내색 한 번 안 한 이 분을 위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하겠다는 각오가 좀 있었고요.
-8강전에서 세계 1위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 선수와 맞붙습니다. 어떻게 준비했나요.
미하라 선수가 세계 최강이었는데 제가 81년도부터 국제 대회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언젠가는 저 선수하고 한 번 붙을 거다. 그래서 저 선수를 면밀히 제가 검토를 하고 일기도 쓰고 저 사람의 장단점을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해왔는데 희한하게도 국제 대회에서 한 번도 붙어 본 적이 없는데 LA 올림픽 8강전에 붙었습니다. 8강전에 붙고 나니까 일본 선수하고 대진표가 짜져 있으니까, 대진표가 한 3~4일 전에 나오거든요. 한국에서는 “큰일났다. 하형주가 금메달 후보인데 대진 운이 안 좋다”고 그렇게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으로 ‘잘 됐다. 나는 언제든지 너랑 붙을 준비가 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고등학교 때 잠깐 배웠던 씨름 기술로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미하라 선수를 무너뜨린 그 기술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예, 똑같은 들배지기 기술이고 한번은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한번은 왼쪽으로 들어가고 똑같이 들어가는데 상대가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오른쪽 들어올 줄 알았는데 왼쪽 들어오고 왼쪽 들어올 줄 알았는데 오른쪽 들어가니까 자기로서는 감당을 하지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게 한판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세계 유도 연맹 회장이 미하라 선수 모교의 총장이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때 당시 화면을 보면 그 총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는 그런 장면도 보입니다.
그때 당시 세계 유도 연맹 회장도 일본 사람, 국제 심판장도 일본 사람, 대부분 심판도 일본 사람들한테 눈치 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 심판들도 그렇게 한판으로 크게 처박는 기술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 기술을 보고 심판도 당황해서 아마 절반을 준 거 같습니다. 그 절반 때문에 한 번 더 들 기회를 맞이한 나는 두 판의 통쾌한 승리를 거두면서 안 그래도 한일전에 숙명전 관계인데 그런 것 때문에 돌아와서 우리 한국 국민들한테 인상이 아주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강호 권터 노이로이터와의 4강전은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권터 노이로이터 선수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선수입니다. 모스크바 올림픽 1등 했고, 몬트리올 올림픽도 은메달 따고, 각종 국제 대회에서 늘 3등 안에 드는 선수입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제가 81년도부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만나면 큰 대회 만날 때마다 저랑 붙습니다. 저랑 붙어서 한 번도 제가 져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연습을 해보면, 우리 시합을 마치면 각국 나라들 합동 훈련 일주일 가거든요. 내가 이 선수를 어떻게 던졌을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강한 선수예요. 나보다 힘도 세고 빠르고요. 근데 시합만 했다 하면 내가 이기는 거예요.
그때도 사실은 미하라 선수하고 하면서 그 8강전에서 팔을 많이 다쳤었고 우두둑 소리 날 정도로 다쳤었고 부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올라갔을 때 힘이 너무 좋으니까 이 선수는 나한테 여러 번 져봤으니까, 힘으로 막 버팁니다. 키도 나보다 크니까 제가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가면 판정으로 지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무리해서라도 공격해서 점수를 따지 않으면 분위기가 내가 안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제가 무리하게 기술을 걸다가 되치기로 당했습니다. 이게 효과가 날아갔고 그다음에 앉아서 이 선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팔도 아프고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의료 시간을 갖다가 최고로 다 활용하면서 그 선수를 이길 수 있는 전략 방법을 생각했는데 마침 이제 그 선수가 이기고 있으니까 자기는 방어가 급급했습니다. 방어가 급급하다 보니까 내 기술에 자기가 말려서 38초 남겨놓고 저한테 더 큰 점수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선수하고 또 제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은 가장 큰 결승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승전을 앞두고 긴장되진 않았나요.
긴장 많이 했죠.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던지는 게 유도의 매력이에요. 왜냐면 지렛대의 원리라고 합니까?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의 빈 곳에 들어가서 큰 사람을 던지든지 안 그러면 상대의 힘을 이용해서 상대를 던지는 게 유도의 매력입니다. 내가 아무리 힘이 있다 해서 비슷한 체급인데 다 비슷할 건데 근데 그 선수는 조건이 나보다 키가 많이 작았습니다. 저런 선수들한테 업어치기나 이런 것들이 약한 게 우리 큰 선수들이 약점이에요. 근데 그거만 배제하면 되게 이길 수 있겠다.
그다음 그 선수도 우리나라 우리 동양 지역의 아시안 게임을 하듯이 팬암 대회를 하고 있습니다. 팬암 대회에서 늘 1등 하는 선수고 그래서 그런 선수한테 말리기 쉬운 기술을 정확하게 제가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다시 나도 그 사람 키에 맞춰서 자세를 낮춰서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조건이 내가 키가 크고 그때까지 국제 경기력도 내가 높았기 때문에 충분히 이긴다고 보고 시합에 임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95kg 이하)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하형주가 시상식에서 기뻐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제공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이제 부상했는데, 이듬해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일본의 스가이 히토시 선수에게 패배합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85년 또 열리는데 결승에 딱 올라가니까 스가이 선수가 결승에 올라온 거예요. 근데 일본 선수한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만큼 일본인 킬러였는데 스가이를 딱 내보냈는데 딱 잡자마자 우리는 잡으면 바로 전율을 느낍니다. 이 시합에 이긴다 진다. 그다음에 까다롭다. 또는 30초 또는 1분에 한판 돌릴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많이 느끼는데 딱 잡고 아이고 큰일 났다 싶은 거예요. 나는 결승에 올라왔기 때문에 붙잡아 보기 전에는 또 금메달 따겠다는 자만심도 있었는데 잡자마자 이어 큰일났다는 생각이 결승을 7분인가 8분인가 했는데 8분 내내 큰일 났다. 그러나 한 번만 걸려주면 된다. 8분 경기하면 한 네 번 정도의 찬스가 오거든요. 그중에 한 번만 걸려라. 한 번만 걸려라 한판 돌린다. 결국은 세 번 걸렸는데, 세 번 다 스가이가 고양이처럼 몸이 엄청나게 부드러운 친구입니다. 근데 유도는 아시겠지만 앞으로 떨어지면 점수가 없습니다 등이 닿아야 점수가 나타납니다. 근데 앞으로만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집어던져도 고양이처럼 그래서 10초 정도 남았길래 이거 뭐 이판사판이에요.
지고 있으니까 뛰어 들어가서 한 번만 걸려도 1초도 안 가고 던질 수 있는 게 유도의 매력이거든요. 뛰어 들어가는데 아주 기본적으로 뒷당겨치기로 스가이한테 딱 말리면서 한판 돌아갔습니다. 참 수치스러운데 아찔했습니다. 근데 내 실력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처음 잡아 보는 상대였거든요. 근데 100명의 한 서너 명 있을 정도의 타입입니다. 저는 공격형이고 상대는 공격에 들어오면 그 틈을 보고 점수를 얻는 선수 스타일입니다.
-이듬해 아시안게임에서 미하라 선수와 다시 격돌해서 패배를 설욕하는데요. 비결이 궁금합니다.
힘든 고통의 시간이 그 1년이었습니다. 최고 힘들었던 시기. 반드시 1년 후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열리는데 일본 선수로 반드시 나올 거고 나도 한국 대표로 나갈 건데 붙을 수밖에 없어요. 근데 도저히 이길 기술이 없습니다. 그 선수한테 제가 갖고 있는 기술 가지고 그래서 제가 일본을 보내 달라고 그랬어요. 일본에 전지훈련 좀 보내 달라. 일본에 가면 그런 스타일을 가끔 만날 수 있으니까. 우리는 몸으로 체득해야지 머리로서 되는 게 아니거든 스포츠는 다 몸으로 체득해야 하거든요. 몸으로 익혀야 하고 세포 하나하나의 기억을 남겨서 반사적으로 써먹어야 할 반복 훈련 중에 연속인데 대한민국에서 기술 노출한다고 안 보내 줍니다. 이미 졌는데 기술 노출한다고 안 보내주고 그게 지방 대학으로서의 서러움이었고요. 그래서 일본에 있는 코치를 초빙합니다. 스가이라는 사람하고 연습을 많이 해본 사람이에요. 코치가 하는 말이 "하형주 왜 스가이한테 지냐?" 왜냐하면 스가이가 일본에서 같은 체급에서 전국 3등 정도 하는 선수예요. 근데 하형주를 던지기 위해서 스가이를 내보낸 거죠. 그래서 그게 효과를 봐서 하형주 누르고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땄죠.
또 아시안 게임에서 붙기 때문에 일본 지도자 코치가 와서 연습하는데, 일본말로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센데 어떻게 스가이한테 졌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한 3개월 태릉선수촌에 같이 있다가 돌아갔는데, 그 선생이 나한테 3개월 동안 해 준 조언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용기, 너 충분히 이긴다. 지면 내 손을 지진다. 분명히 이번에 이긴다. 그게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됐고요.
마침내 시간이 다가와서 아시안 게임을 서울에서 하면서 마음고생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딱 시합을 붙는데 역시 센 거예요. 역시 센데 한 번만 걸려주면 되는데 안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의 생각을 총정리해서 지난번에 1년 전에 딱 10초 남겨 놓고 제가 한판 떨어진 게 있습니다. 그 기술 그 모션 그 느낌 그 힘의 강도에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딱 들어가니까 그대로 기억하고 있던 기술이 스가이로부터 들어옵니다. 또 모두걸기라는 기술로 쳐서 그것도 공중에서 또 떨어지지, 앞으로 처박히려고 하는 거 갖다가 뒤에 우리 미끄러운 핸들 빙판에 한 번씩 쏠리면 놀라는 거 있잖아요. 그 핸들 활짝 집어넣어야 등이 닿으니까, 제가 절반을 얻었습니다. 절반은 큰 득점이거든요. 그래서 시간을 보니까 아직도 2분 30초 남았습니다. 근데 이번 30초 아무 걱정이 안 되는 게 내가 공격만 안 하면 그 선수는 나를 던질 기술이 없어요. 내가 공격하면 겉으로 보고 들어오는 기술이기 때문에 손싸움만 이렇게 하다가 2분 딱 보내놓고 1년 동안 마음고생 많았고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그만큼 어려운 기간을 보냈던 게 없었고 금메달 따고 숙소에 와서 ‘내가 이거 하나 따려고 내가 이렇게 마음고생이 심했냐’ 하면서 내가 운 적이 있습니다.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유도 하프헤비급 한국 하형주-일본 스가이 히토시 결승, 하형주 금메달. 부산일보DB
-패배와 부상 등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훈련량이 많았고요. 우리나라도 또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 있었고 그래서 포기라는 단어는 감히 있을 수 없고요. 그런 것들이 나를 지탱해 주고,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내게 용기를 줬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그 힘 원천이 그거예요.
두 번째로는 이제 순간마다 어려운 것들이 밀려옵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때마다 항상 초심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인지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돌아와서 다시 그 원인을 스캔을 떠냅니다. 그때부터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본기가 있는 것이 나한테 극복할 수 있는 원천의 힘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제 자신의 싸움이었고 처절한 고독의 연속이었고 이거는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나이가 아니다. 남자가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나를 늘 바로 서게 했던 힘이었습니다.
-유도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유도라든지 태권도 무도 쪽의 운동은 종교입니다. 자기와 신앙이고 종교고 그다음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싸움이지 남이 있다고 해서 남하고 꼭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자기를 얼마나 추스르느냐 낮추느냐. 그래서 겸손을 배우느냐. 그리고 다가오는 순간마다 그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느냐. 이런 것도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특히 내가 전공했던 유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아니겠느냐.
-선수 은퇴 후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갖고 있었던 그 경험들 선수촌 생활하고 시합을 앞두면 그 전날 잠 못 자는 거는 기본이고 그 며칠 전부터 불안, 초조, 긴장의 연속이고 또는 그때마다 또 새롭게 난 할 수 있어 훈련량이 상대보다 많았다. 또는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는 확신 신념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왔다 갔다 하는데, 그것을 컨트롤하는 게 스포츠 심리학입니다. 불안, 긴장, 초조함에 사로잡혀있는 선수들 때문에 메달 색깔이 달라지거든요.
근데 그러한 시합 출전에 임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불안, 초조, 긴장보다는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확신, 용기, 자신감 이런 걸로 충만했을 때는 결과는 뻔한 겁니다. 자신감이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찬 선수가 이길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것도 역시 트레이닝이 돼야 해요. 그게 스포츠 심리학입니다. 제가 후배들한테 저보다 더 많고 좋은 색깔의 메달을 따게 해야 한다는 소명감 그게 좀 나아가면 좀 커진다면 그 국가이 나한테 꽉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팬들이 ‘왕발’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 발 크기에 관한 사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제 발 크기가 310mm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맞는 게 없었어요. 학교 앞에서 맨발로 다니고 공 찰 때도 맨발로 차다 보니까 발가락 10개가 전부 다 멍이 들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신발에 대한 애환이 많습니다. 내 발에 맞는 신발이 나한테 왔을 때 가장 기뻤던 것 같아요.
저를 이 자리까지 있게 한 정신적 지주가 우리 큰누나였습니다. 큰누나가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부산 국제시장에서 미군들이 신는 신발을 운동화를 두 켤레나 사 온 거예요. 그 두 켤레 신발을 들고 발 크기보다 오히려 조금 큰 것도 있고 딱 맞는 것도 신어 보니까 그냥 한 3년 만에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봤습니다. 너무너무 좋았는지 고맙다는 걸 물론이고 그걸 안고 잤어요. 우리 큰 누님이 '그리 좋나?' 이러더라고요. '너무 좋다 이거' 이러니까 우리 큰 누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 그거 꼭 기억해라 오늘! 이 기쁨을 기억해라. 그리고 나중에 커서 혹시 인터뷰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오늘이 기쁨을 인터뷰해라” 그때 당시엔 상상도 못 했죠.
부산 부산진구 한국신발관에는 하형주가 가장 애용한 310mm 크기의 운동화가 전시되어 있다. 김동우 기자 friend@
-한때 한국은 물론 세계 유도계를 주름잡았던 부산 유도가 침체에 빠진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참 안타까운 질문을 해주셨는데 지금 전체적인 한국 스포츠 현상으로 봐도 될 거고요. 최근에 항저우 아시안 게임이라든지 도쿄 올림픽이라든지 성적이 매우 안 좋습니다. 워낙 힘든 운동이었기 때문에 인구 절벽이라서 또 그런 상황도 생길 수 있는데 특히 유도가 부산의 동아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메카였습니다. 그다음에 동아대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또 부산 체육고등학교라는 명문고등학교도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자꾸 선수가 줄어든다는 거 그다음에 다른 스포츠가 발전하면서 가치관이 좀 달라졌다는 거 그다음에 물질 만능주의로 자꾸 빠진다는 거 이런 것들이 혼합된 문제점들이 지금 우리 한국 전체 스포츠가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고요.
부산 지역의 유도하시는 분들의 부분도 그런 문제와 같이 함께하는 거 아닌지 그래서 조금 안타깝습니다. 용인대학교가 너무 독점하다 보니까 지방대학에서는 어렵게 하고 있고 특히 사립대학에서는 IMF 이후에 등록금이 동결돼서 거의 제일 먼저 운동부부터 축소하고 폐지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 여파가 크고 특히 동아대학교 유도가 폐지될 정도라면 다른 대학에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크겠지요. 한쪽에 독주 되는 시절이 되다 보니까 지방대학에서는 국제 경기도 한 번 못 나가는데, 국제대회에 못 나갈 정도라면 이런 부가 뭐가 필요하냐고 학교에서도 폐지를 많이 시키고. 지금 전국적으로 지방 대학, 한국 체육이 죽었다고 하죠.
-지역 유도를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안을 만들 것인가 대학 총장 위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서도 지금 대학 체육부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그 돈 역시 서울 올림픽 기념 체육진흥공단에서 간접적으로 보조를 하고 있고 그다음에 대학생도 중요하지만, 초, 중, 고등학교 밑의 풀뿌리부터 운동부가 활성화돼야 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좀 열악해서 앞으로도 그런 부분은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제가 정책을 만들고 준비하고 있고 아주 큰 관심이 있습니다.
김동우 기자(friend@busan.com)
장면 2. 310mm가 넘는 발 크기로 ‘왕발’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학생 때는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하지 못해 맨발로 운동장을 뛰기도 했습니다. 처음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갖게 된 날 하형주는 기쁜 마음에 신발을 품에 안고 자기도 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세계 정상에 오른 뒤 교수(동아대)를 거쳐 스포츠 행정가(국민체육진흥공단)로 변신하기까지, 여러분이 몰랐던 하형주의 숨겨진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소개합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하형주 상임감사가 자신의 선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정수원·김보경 PD blueskyda2@
-유년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보다는 체격이 좀 컸고요. 체격과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포츠를 접하는 횟수가 많았고요. 그러다 보니까 다양한 놀이 문화로서 하나씩 스포츠를 접했던 것 같습니다.
-유도 이전에 씨름 선수로 활약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가운데 아무래도 체격도 있고 하니까 운동하는 각 부에서 저를 많이 탐냈던 건 사실이고 유혹도 많았습니다. 근데 저는 어릴 때부터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돼서 장군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우연히 씨름을 접하게 됐습니다. 근데 씨름도 접했을 때 진주상고라는 걸출한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잘했던 고등학교인데 거기에서 스카우트 돼서 딱 6개월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6개월 동안 씨름도 참 재미있었고 실력도 왕성히 늘었고 나중에는 그 씨름의 계기가 유도 대표 선수 생활하는데 큰 받침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유도로 종목을 전향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이왕 운동할 거면 올림픽 종목 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앞에 여러 종목 중에서 유도라는 스포츠가 저한테 어릴 때부터 매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먼 친척 중에 한국 유도 챔피언이 있었거든요. 그분을 따라서 막연히 유도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 운동할 때 올림픽 종목 유도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작정했습니다. 유도는 제가 있었던 진주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전학을 가서 마음에 드는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전학 가서 본격적으로 하게 됐고, 그 와중에 체육고등학교라는 특수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다 보니까 레슬링부에서도 전국체육대회에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이 들어와서 유도도 하면서 전국체전 때만 시합을 나갔었습니다. 레슬링 시합을 나갔는데 레슬링은 아시다시피 그레코로만형하고 자유형하고 두 종류 있잖아요. 두 종류 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가서 전국체전 금메달을 두 개 따고 3학년 때도 전국체전 금메달 네 개를 딴 적이 있습니다. 레슬링을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유도를 했던 바탕이 돼 있고 그다음에 레슬링은 심판 룰을 알아야 하니까 경기 룰만 좀 배워서 나갔는데 운 좋게 제가 전국에 1등 하게 되고 그랬었습니다.
-동아대 시절 훈련법이 독특했다고 들었습니다.
본격적인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 시작했던 건 대학에 들어가면서인데요. 제가 유도 헤비급이었기 때문에 연습 파트너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늘 연습량이 부족했는데 우리 동아대학교 유도부의 전통은 헤비급들이 다 잘했습니다. 우리 동아대학교 뒤에 보면 구덕산이라고 아주 명산이 있습니다. 지금은 동아의료원으로 바뀌어 있고 그 뒷산에 보면 편백나무가 너무 많습니다. 편백나무는 아시다시피 쫙쫙 뻗어 있는데요. 그래서 동아대학교에서만 내려오는 연습 방법의 하나가 편백나무를 잡고 밭다리후리기라든지 기술 넣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걸 한 6개월 정도 하고 나면 일반 사람들은 그냥 넘기기가 좀 쉬웠지요. 그만큼 우리들만의 그 파트너가 부족했고 연습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걸로 연습량을 채웠습니다.
재미나는 뭐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저녁에 혼자 운동하고 있으니까, 절에서 스님이 "나무 부러진다"고 (제가) 우리 동아대학교 운동복을 입고 있으니까 동아대학교 총장한테 일러준 거예요. 그래서 총장님한테 불려 잡혀갔는데, "왜 나무를 못살게 굴었나" 하길래 "못살게 군 게 아니고 연습량이 부족해서 나무를 붙잡고 연습을 매일 밤 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 유도부 전통 훈련 방법입니다. 나무 안 다칩니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칭찬도 받고 고기 사 먹으라고 용돈도 받고 그랬었습니다.
-훈련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저는 운동하면서 힘들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즐거웠고, 매일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게 너무 빨리 밤이 지나서 다음날 오기를 바랄 정도로 유도에 푹 빠져 있었거든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유도가 제 인생이 있어서 하나의 종교로 자리 잡을 정도였으니까요. 매일 새로 바뀌어 나가는 내 모습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했지 힘든 거는 별로 못 느꼈습니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 앞에서 태극기를 든 하형주가 기수로 입장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1984년 LA 올림픽 개막을 40여 일 앞두고 큰 부상을 당했는데, 당시 어떤 심정이었나요.
저희는 국제 경기를 앞두고는 일요일이나 현충일 때도 연습했거든요. 그날 내가 너무 많은 긴장도 했었고 또 연습량이 너무 많은 상황에서 선수를 던졌습니다. 선수가 앞에 한 바퀴만 돌아가야 하는데 한 바퀴 반이 돌아가면서 빨려 들어가면서 제 머리를 매트에 박혔습니다. 머리를 매트에 박히니까 허리 목 밑으로 마비 증세가 왔지요. 그래서 허리를 크게 다쳤던 기억이 있었던 게 그때 첫 좌절이라 할까요. 지난번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도 내가 못 나갔는데 다쳤으니까, ‘나하고 올림픽하고는 인연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그다음에 참 많이 억울해하면서도 울면서 병원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다쳤을 때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이제 우리 모든 선수촌 관계자가 와서 격려하고 했는데 저한테 격려해 주신 선수촌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언제든지 곧 일어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너는 대한민국 기수로 뽑혔다.” 였어요. 선수단 기수로 뽑혔다길래 제가 깜짝 놀라요. 기수는 참 영광스러운 자리거든요.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 상징적으로 금메달을 확실히 딸 수 있는 사람을 시키거든요. 그래서 내가 꼭 붙잡고 “저는 안 됩니다. 그 어려운 막중한 기수를 내가 어떻게 합니까. 지금 내 허리도 제대로 못 쓰는데” 하니까. “너는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신 분이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 두 번이나 딴 김성집 총장이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많이 도와줬고 그분에 의해서 제가 금메달 딸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LA 현지에 가서 연습 파트너가 부족하다고 했는데, 제 선배 되시는 분이 딱한 사정을 알고 대신 받아줬습니다. 유도를 그분도 안 하다가 하니까 온 전신에 멍이 들 정도로 낙법을 쳐도 우리는 몸이 평상시에 많이 단련돼 있지만 그분은 유도 안 하다가 하시다 보니까 멍이 들 정도로 제 유도 파트너가 돼 주셨습니다. 또 그 아픔을 다 견뎌내고 내색 한 번 안 한 이 분을 위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하겠다는 각오가 좀 있었고요.
-8강전에서 세계 1위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 선수와 맞붙습니다. 어떻게 준비했나요.
미하라 선수가 세계 최강이었는데 제가 81년도부터 국제 대회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언젠가는 저 선수하고 한 번 붙을 거다. 그래서 저 선수를 면밀히 제가 검토를 하고 일기도 쓰고 저 사람의 장단점을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해왔는데 희한하게도 국제 대회에서 한 번도 붙어 본 적이 없는데 LA 올림픽 8강전에 붙었습니다. 8강전에 붙고 나니까 일본 선수하고 대진표가 짜져 있으니까, 대진표가 한 3~4일 전에 나오거든요. 한국에서는 “큰일났다. 하형주가 금메달 후보인데 대진 운이 안 좋다”고 그렇게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으로 ‘잘 됐다. 나는 언제든지 너랑 붙을 준비가 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고등학교 때 잠깐 배웠던 씨름 기술로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미하라 선수를 무너뜨린 그 기술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예, 똑같은 들배지기 기술이고 한번은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한번은 왼쪽으로 들어가고 똑같이 들어가는데 상대가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오른쪽 들어올 줄 알았는데 왼쪽 들어오고 왼쪽 들어올 줄 알았는데 오른쪽 들어가니까 자기로서는 감당을 하지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게 한판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세계 유도 연맹 회장이 미하라 선수 모교의 총장이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때 당시 화면을 보면 그 총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는 그런 장면도 보입니다.
그때 당시 세계 유도 연맹 회장도 일본 사람, 국제 심판장도 일본 사람, 대부분 심판도 일본 사람들한테 눈치 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 심판들도 그렇게 한판으로 크게 처박는 기술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 기술을 보고 심판도 당황해서 아마 절반을 준 거 같습니다. 그 절반 때문에 한 번 더 들 기회를 맞이한 나는 두 판의 통쾌한 승리를 거두면서 안 그래도 한일전에 숙명전 관계인데 그런 것 때문에 돌아와서 우리 한국 국민들한테 인상이 아주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강호 권터 노이로이터와의 4강전은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권터 노이로이터 선수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선수입니다. 모스크바 올림픽 1등 했고, 몬트리올 올림픽도 은메달 따고, 각종 국제 대회에서 늘 3등 안에 드는 선수입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제가 81년도부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만나면 큰 대회 만날 때마다 저랑 붙습니다. 저랑 붙어서 한 번도 제가 져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연습을 해보면, 우리 시합을 마치면 각국 나라들 합동 훈련 일주일 가거든요. 내가 이 선수를 어떻게 던졌을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강한 선수예요. 나보다 힘도 세고 빠르고요. 근데 시합만 했다 하면 내가 이기는 거예요.
그때도 사실은 미하라 선수하고 하면서 그 8강전에서 팔을 많이 다쳤었고 우두둑 소리 날 정도로 다쳤었고 부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올라갔을 때 힘이 너무 좋으니까 이 선수는 나한테 여러 번 져봤으니까, 힘으로 막 버팁니다. 키도 나보다 크니까 제가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가면 판정으로 지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무리해서라도 공격해서 점수를 따지 않으면 분위기가 내가 안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제가 무리하게 기술을 걸다가 되치기로 당했습니다. 이게 효과가 날아갔고 그다음에 앉아서 이 선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팔도 아프고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의료 시간을 갖다가 최고로 다 활용하면서 그 선수를 이길 수 있는 전략 방법을 생각했는데 마침 이제 그 선수가 이기고 있으니까 자기는 방어가 급급했습니다. 방어가 급급하다 보니까 내 기술에 자기가 말려서 38초 남겨놓고 저한테 더 큰 점수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선수하고 또 제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은 가장 큰 결승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승전을 앞두고 긴장되진 않았나요.
긴장 많이 했죠.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던지는 게 유도의 매력이에요. 왜냐면 지렛대의 원리라고 합니까?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의 빈 곳에 들어가서 큰 사람을 던지든지 안 그러면 상대의 힘을 이용해서 상대를 던지는 게 유도의 매력입니다. 내가 아무리 힘이 있다 해서 비슷한 체급인데 다 비슷할 건데 근데 그 선수는 조건이 나보다 키가 많이 작았습니다. 저런 선수들한테 업어치기나 이런 것들이 약한 게 우리 큰 선수들이 약점이에요. 근데 그거만 배제하면 되게 이길 수 있겠다.
그다음 그 선수도 우리나라 우리 동양 지역의 아시안 게임을 하듯이 팬암 대회를 하고 있습니다. 팬암 대회에서 늘 1등 하는 선수고 그래서 그런 선수한테 말리기 쉬운 기술을 정확하게 제가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다시 나도 그 사람 키에 맞춰서 자세를 낮춰서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조건이 내가 키가 크고 그때까지 국제 경기력도 내가 높았기 때문에 충분히 이긴다고 보고 시합에 임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95kg 이하)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하형주가 시상식에서 기뻐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제공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이제 부상했는데, 이듬해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일본의 스가이 히토시 선수에게 패배합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85년 또 열리는데 결승에 딱 올라가니까 스가이 선수가 결승에 올라온 거예요. 근데 일본 선수한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만큼 일본인 킬러였는데 스가이를 딱 내보냈는데 딱 잡자마자 우리는 잡으면 바로 전율을 느낍니다. 이 시합에 이긴다 진다. 그다음에 까다롭다. 또는 30초 또는 1분에 한판 돌릴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많이 느끼는데 딱 잡고 아이고 큰일 났다 싶은 거예요. 나는 결승에 올라왔기 때문에 붙잡아 보기 전에는 또 금메달 따겠다는 자만심도 있었는데 잡자마자 이어 큰일났다는 생각이 결승을 7분인가 8분인가 했는데 8분 내내 큰일 났다. 그러나 한 번만 걸려주면 된다. 8분 경기하면 한 네 번 정도의 찬스가 오거든요. 그중에 한 번만 걸려라. 한 번만 걸려라 한판 돌린다. 결국은 세 번 걸렸는데, 세 번 다 스가이가 고양이처럼 몸이 엄청나게 부드러운 친구입니다. 근데 유도는 아시겠지만 앞으로 떨어지면 점수가 없습니다 등이 닿아야 점수가 나타납니다. 근데 앞으로만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집어던져도 고양이처럼 그래서 10초 정도 남았길래 이거 뭐 이판사판이에요.
지고 있으니까 뛰어 들어가서 한 번만 걸려도 1초도 안 가고 던질 수 있는 게 유도의 매력이거든요. 뛰어 들어가는데 아주 기본적으로 뒷당겨치기로 스가이한테 딱 말리면서 한판 돌아갔습니다. 참 수치스러운데 아찔했습니다. 근데 내 실력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처음 잡아 보는 상대였거든요. 근데 100명의 한 서너 명 있을 정도의 타입입니다. 저는 공격형이고 상대는 공격에 들어오면 그 틈을 보고 점수를 얻는 선수 스타일입니다.
-이듬해 아시안게임에서 미하라 선수와 다시 격돌해서 패배를 설욕하는데요. 비결이 궁금합니다.
힘든 고통의 시간이 그 1년이었습니다. 최고 힘들었던 시기. 반드시 1년 후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열리는데 일본 선수로 반드시 나올 거고 나도 한국 대표로 나갈 건데 붙을 수밖에 없어요. 근데 도저히 이길 기술이 없습니다. 그 선수한테 제가 갖고 있는 기술 가지고 그래서 제가 일본을 보내 달라고 그랬어요. 일본에 전지훈련 좀 보내 달라. 일본에 가면 그런 스타일을 가끔 만날 수 있으니까. 우리는 몸으로 체득해야지 머리로서 되는 게 아니거든 스포츠는 다 몸으로 체득해야 하거든요. 몸으로 익혀야 하고 세포 하나하나의 기억을 남겨서 반사적으로 써먹어야 할 반복 훈련 중에 연속인데 대한민국에서 기술 노출한다고 안 보내 줍니다. 이미 졌는데 기술 노출한다고 안 보내주고 그게 지방 대학으로서의 서러움이었고요. 그래서 일본에 있는 코치를 초빙합니다. 스가이라는 사람하고 연습을 많이 해본 사람이에요. 코치가 하는 말이 "하형주 왜 스가이한테 지냐?" 왜냐하면 스가이가 일본에서 같은 체급에서 전국 3등 정도 하는 선수예요. 근데 하형주를 던지기 위해서 스가이를 내보낸 거죠. 그래서 그게 효과를 봐서 하형주 누르고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땄죠.
또 아시안 게임에서 붙기 때문에 일본 지도자 코치가 와서 연습하는데, 일본말로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센데 어떻게 스가이한테 졌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한 3개월 태릉선수촌에 같이 있다가 돌아갔는데, 그 선생이 나한테 3개월 동안 해 준 조언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용기, 너 충분히 이긴다. 지면 내 손을 지진다. 분명히 이번에 이긴다. 그게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됐고요.
마침내 시간이 다가와서 아시안 게임을 서울에서 하면서 마음고생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딱 시합을 붙는데 역시 센 거예요. 역시 센데 한 번만 걸려주면 되는데 안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의 생각을 총정리해서 지난번에 1년 전에 딱 10초 남겨 놓고 제가 한판 떨어진 게 있습니다. 그 기술 그 모션 그 느낌 그 힘의 강도에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딱 들어가니까 그대로 기억하고 있던 기술이 스가이로부터 들어옵니다. 또 모두걸기라는 기술로 쳐서 그것도 공중에서 또 떨어지지, 앞으로 처박히려고 하는 거 갖다가 뒤에 우리 미끄러운 핸들 빙판에 한 번씩 쏠리면 놀라는 거 있잖아요. 그 핸들 활짝 집어넣어야 등이 닿으니까, 제가 절반을 얻었습니다. 절반은 큰 득점이거든요. 그래서 시간을 보니까 아직도 2분 30초 남았습니다. 근데 이번 30초 아무 걱정이 안 되는 게 내가 공격만 안 하면 그 선수는 나를 던질 기술이 없어요. 내가 공격하면 겉으로 보고 들어오는 기술이기 때문에 손싸움만 이렇게 하다가 2분 딱 보내놓고 1년 동안 마음고생 많았고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그만큼 어려운 기간을 보냈던 게 없었고 금메달 따고 숙소에 와서 ‘내가 이거 하나 따려고 내가 이렇게 마음고생이 심했냐’ 하면서 내가 운 적이 있습니다.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유도 하프헤비급 한국 하형주-일본 스가이 히토시 결승, 하형주 금메달. 부산일보DB
-패배와 부상 등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훈련량이 많았고요. 우리나라도 또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 있었고 그래서 포기라는 단어는 감히 있을 수 없고요. 그런 것들이 나를 지탱해 주고,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내게 용기를 줬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그 힘 원천이 그거예요.
두 번째로는 이제 순간마다 어려운 것들이 밀려옵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때마다 항상 초심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인지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돌아와서 다시 그 원인을 스캔을 떠냅니다. 그때부터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본기가 있는 것이 나한테 극복할 수 있는 원천의 힘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제 자신의 싸움이었고 처절한 고독의 연속이었고 이거는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나이가 아니다. 남자가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나를 늘 바로 서게 했던 힘이었습니다.
-유도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유도라든지 태권도 무도 쪽의 운동은 종교입니다. 자기와 신앙이고 종교고 그다음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싸움이지 남이 있다고 해서 남하고 꼭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자기를 얼마나 추스르느냐 낮추느냐. 그래서 겸손을 배우느냐. 그리고 다가오는 순간마다 그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느냐. 이런 것도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특히 내가 전공했던 유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아니겠느냐.
-선수 은퇴 후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갖고 있었던 그 경험들 선수촌 생활하고 시합을 앞두면 그 전날 잠 못 자는 거는 기본이고 그 며칠 전부터 불안, 초조, 긴장의 연속이고 또는 그때마다 또 새롭게 난 할 수 있어 훈련량이 상대보다 많았다. 또는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는 확신 신념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왔다 갔다 하는데, 그것을 컨트롤하는 게 스포츠 심리학입니다. 불안, 긴장, 초조함에 사로잡혀있는 선수들 때문에 메달 색깔이 달라지거든요.
근데 그러한 시합 출전에 임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불안, 초조, 긴장보다는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확신, 용기, 자신감 이런 걸로 충만했을 때는 결과는 뻔한 겁니다. 자신감이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찬 선수가 이길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것도 역시 트레이닝이 돼야 해요. 그게 스포츠 심리학입니다. 제가 후배들한테 저보다 더 많고 좋은 색깔의 메달을 따게 해야 한다는 소명감 그게 좀 나아가면 좀 커진다면 그 국가이 나한테 꽉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팬들이 ‘왕발’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 발 크기에 관한 사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제 발 크기가 310mm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맞는 게 없었어요. 학교 앞에서 맨발로 다니고 공 찰 때도 맨발로 차다 보니까 발가락 10개가 전부 다 멍이 들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신발에 대한 애환이 많습니다. 내 발에 맞는 신발이 나한테 왔을 때 가장 기뻤던 것 같아요.
저를 이 자리까지 있게 한 정신적 지주가 우리 큰누나였습니다. 큰누나가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부산 국제시장에서 미군들이 신는 신발을 운동화를 두 켤레나 사 온 거예요. 그 두 켤레 신발을 들고 발 크기보다 오히려 조금 큰 것도 있고 딱 맞는 것도 신어 보니까 그냥 한 3년 만에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봤습니다. 너무너무 좋았는지 고맙다는 걸 물론이고 그걸 안고 잤어요. 우리 큰 누님이 '그리 좋나?' 이러더라고요. '너무 좋다 이거' 이러니까 우리 큰 누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 그거 꼭 기억해라 오늘! 이 기쁨을 기억해라. 그리고 나중에 커서 혹시 인터뷰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오늘이 기쁨을 인터뷰해라” 그때 당시엔 상상도 못 했죠.
부산 부산진구 한국신발관에는 하형주가 가장 애용한 310mm 크기의 운동화가 전시되어 있다. 김동우 기자 friend@
-한때 한국은 물론 세계 유도계를 주름잡았던 부산 유도가 침체에 빠진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참 안타까운 질문을 해주셨는데 지금 전체적인 한국 스포츠 현상으로 봐도 될 거고요. 최근에 항저우 아시안 게임이라든지 도쿄 올림픽이라든지 성적이 매우 안 좋습니다. 워낙 힘든 운동이었기 때문에 인구 절벽이라서 또 그런 상황도 생길 수 있는데 특히 유도가 부산의 동아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메카였습니다. 그다음에 동아대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또 부산 체육고등학교라는 명문고등학교도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자꾸 선수가 줄어든다는 거 그다음에 다른 스포츠가 발전하면서 가치관이 좀 달라졌다는 거 그다음에 물질 만능주의로 자꾸 빠진다는 거 이런 것들이 혼합된 문제점들이 지금 우리 한국 전체 스포츠가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고요.
부산 지역의 유도하시는 분들의 부분도 그런 문제와 같이 함께하는 거 아닌지 그래서 조금 안타깝습니다. 용인대학교가 너무 독점하다 보니까 지방대학에서는 어렵게 하고 있고 특히 사립대학에서는 IMF 이후에 등록금이 동결돼서 거의 제일 먼저 운동부부터 축소하고 폐지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 여파가 크고 특히 동아대학교 유도가 폐지될 정도라면 다른 대학에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크겠지요. 한쪽에 독주 되는 시절이 되다 보니까 지방대학에서는 국제 경기도 한 번 못 나가는데, 국제대회에 못 나갈 정도라면 이런 부가 뭐가 필요하냐고 학교에서도 폐지를 많이 시키고. 지금 전국적으로 지방 대학, 한국 체육이 죽었다고 하죠.
-지역 유도를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안을 만들 것인가 대학 총장 위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서도 지금 대학 체육부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그 돈 역시 서울 올림픽 기념 체육진흥공단에서 간접적으로 보조를 하고 있고 그다음에 대학생도 중요하지만, 초, 중, 고등학교 밑의 풀뿌리부터 운동부가 활성화돼야 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좀 열악해서 앞으로도 그런 부분은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제가 정책을 만들고 준비하고 있고 아주 큰 관심이 있습니다.
김동우 기자(friend@busan.com)